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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 박스(The Wonderbox)』 - 로먼 크르즈나릭(Roman Krznaric)

통참 2021. 6. 5. 23:32

로먼 크르즈나릭(Roman Krznaric)

 

한국에서는 작가 알랭 드 보통이 꽤나 인기가 많습니다. 서점가 매대에도 알랭 드 보통이 자주 올라 있고 지성인들이 한 데 모이는 큰 강연회가 있으면 연사로 한국까지 모셔올 정도니 웬만한 서구 작가들 중에서는 가장 인기가 좋아 보입니다. 저도 그의 저서 불안’, ‘여행의 기술’, ‘인생학교를 읽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영국 런던의 인생학교의 교장이 되었는데, 이 학교는 다른 학교와는 가르치는 것이 많이 다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생학교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에 대해 가르칩니다. , 세상, 시간, 정신, , 그리고 섹스. 수학이나 영어와 같은 과목이 아니라 인생을 다루는 실질적이고 다양한 가르침이 인생학교의 이름으로 출간되었으니 가히 인생학교라고 할 만합니다.

 

사실 알랭 드 보통과 인생학교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이름도 생소한 로먼 크르즈나릭이라는 작가를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로먼 크르즈나릭은 인생학교의  편을 집필한 작가이자 인생학교의 공동 설립자 중 한 명입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공인된 인생 구루인 셈입니다. 그는 또한 능력 있는 정원사이며 수준급의 테니스 실력을 가진 테니스 선수이기도 합니다. 테니스도 잘 치지만 무엇보다도 글을 짓는 능력이 기가 막힙니다. 수사도 수사지만 옛 것에서 유익한 자료를 취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여기서는 감명 깊게 읽은 사랑에 대한 내용을 다루겠습니다.

 

흔히들 사랑이라는 단어는 정의될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문학적인 수사를 통해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절벽 위에서 님을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된 과부의 마음이 될 수도 있고 나의 모든 순간이 너의 순간이 되는 체험이라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사랑하는 감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호르몬이나 화학작용을 통해 설명하곤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에는 사랑이 여수밤바다를 함께 걷고 싶은 느낌이라고 합니다.
 
대개 사랑을 노래한 가요와 소설에는 죽고는 못 사는 청춘들의 불타오르는 사랑 이야기가 많습니다. 누구나 가슴 저리게 공감할 수 있는 소재이기에 사랑을 정의하기에 가장 보편적인 기준이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사랑하는 부모님께 사랑하는 아들에게’, 또는 사랑하는 형, 누나에게와 같은 다른 형태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연인을 사랑하는 불타는 감정과 부모님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는 감정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우리말은 구분 없이 아울러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사피어-워프 가설이라 불리는 이론이 있습니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이론입니다. 태생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이론인 까닭에 이 이론은 인정받거나, 혹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다만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다양한 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지개의 색깔을 표현하는 방법이 나라마다 다른 것은 색깔을 표현하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쉽게 뭉뚱그려지곤 합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다채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 이유는 우리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이 사랑이라는 말 하나에 모두 녹아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직 사랑이라는 말로 합쳐지지 않은 다양한 사랑이 존재했습니다. 에로스, 필리아, 루두스, 필라우티아, 아가페, 프라그마의 여섯 가지 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간략히 소개하자면, 에로스는 전술한 불타는 사랑과 그 의미가 가깝습니다. 연인 사이에 느끼는 절절한 욕망의 감정이 에로스에 해당합니다. 필리아는 부모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루두스는 유희적인 사랑입니다. 술자리나 사교계에서 즐기듯 가볍게 하는 사랑입니다. 필라우티아는 자기애입니다. 극단적이긴 하지만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 나르시스의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대상을 막론하고 조건을 막론하는 거룩한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프라그마는 오래된 부부가 하는 성숙한 사랑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개념 정의에 따르면 사랑이라는 단어가 갖는 의미는 오히려 많은 뜻을 함축한 우리의 사랑이라는 말보다 더 넓고 구체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서로 다른 말 사이의 차이점을 다루려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다양한 사랑 개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네 사람들은 불타는 에로스의 사랑만을 사랑이라고 오해하는 순간이 더러 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면 사랑이 끝났다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똑같이 사랑해주지 않으면 나는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 내지는 더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연인간의 격정적인 사랑이 잦아들면 사랑이 식었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가볍고 유희적인 사랑은 진중하지 못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애라는 표현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르시스트라고 불립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인의 사랑 개념에 따르면 격정적인 에로스는 수많은 사랑 중에 일부일 뿐이며, 에로스를 잃었다고 사랑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루두스의 사랑도 사랑의 한 모습입니다. 불경한 만남이 아닌, 설렘이 오고 가는 사랑의 한 단면입니다. ‘필라우티아는 모든 사랑의 시작입니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한 가지 사랑이 자신을 떠나간다고 느낄지라도 다른 사랑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의 한 가지 단면에 치우치지 않고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찾으며, 사랑을 받고 있음을 느끼고, 사랑을 주고 있음을 느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인의 사랑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가볍게 이야기 할 이성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언제나 곁에 있으니 사랑할 시간이 ‘24시간이 모자란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