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왕』 - 소포클레스(Sophocles)
서론
소포클레스의 희곡 작품 중 단연 최고의 비극으로 손꼽히는 『오이디푸스 왕』은 예견된 운명과 그 안에서 누려지는 자유의 실체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집니다. 이야기 안에서 오이디푸스는 점지된 운명에 맞서 자신의 삶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운명에 맞서 자유 의지를 내비칩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탐한다’는 예언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나 유랑하기도 하고, 스핑크스를 자신의 지혜로 물리치기도 하며 매 순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자유 의지를 발현합니다. 하지만 그가 현실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예견된 운명적 비극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뿌리를 찾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들은 운명의 장난처럼 비극의 복선이 되었고 그의 자유로운 의지는 예견된 신탁을 추동하는 아이러니가 되었습니다. 정해진 운명에 맞서 ‘자유의 화신’이 되려고 했으나 결국 잔혹한 ‘운명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던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통해 작품 속에 드러난 자유와 운명의 대립 양상을 살펴보고 오이디푸스의 운명론적 비극에 얽힌 필연성에 대해 심층적으로 알아보고자 합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운명과 자유의 개념을 명확하게 전제하고 운명과 자유의 상관관계에 대한 전제적인 개념화를 선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운명과 자유라는 개념에 대한 직관적이고 일반론적인 해석이 가지는 문제점을 파악하고 논의의 차원을 명확히 한정하기 위하여 스피노자와 라캉의 개념을 차용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운명 개념은 만물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예견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사전에 결정짓는 논리로서 기능합니다. 이러한 운명 개념은 때로 절대적이거나 전제적인 힘과 결부되어 운명을 결정짓는 절대자가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운명 개념을 뒷받침할 수 있는 합리적인 근거는 미약한 편이며, 나아가 운명론적 시각은 자유 의지를 가진 만물의 자발적인 작용을 무의미한 것으로 격하하고 수동성을 강제함으로써 주체를 객체화하는 맹목적이고 파괴적인 관점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을 전제하면 만물의 자유 의지는 더 이상 가치를 갖지 못하게 되며 자유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한 공염불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후술할 운명과 자유의 개념은 크게 필연성과 우연 개념에 의해 규정될 것입니다. 실제로 필연성 개념은 크게 물질적 의미에서의 필연성, 그리고 정신적 의미에서의 필연성으로 구분하여 서술하지만 실제 세계에서 두 분류 간의 명확한 구분점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필연성 개념을 물질과 정신의 두 부분으로 구획한 것은 논의의 편의를 위한 것임을 미리 밝힙다.
물질적 의미에서의 필연성
스피노자의 결정론은 세계의 어떤 것도 그것이 그렇게 존재하게 된 것에는 원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유한성을 내재한 존재는 필연적으로 물질적 인과법칙에 입각해서 본성적 특징이 규정되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 의미에서의 필연성은 각 인과법칙들의 복합적인 작용을 통해 우리에게 작용하고 경험됩니다. 결국 우리는 유한한 존재들을 기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여러 법칙들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며 태생적으로 구속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의지대로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신적 의미에서의 필연성
그렇다면 정신의 경우는 어떨까요?. 정신은 물질적인 것과는 다르게 제약 없는 자유를 가지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외부의 어떤 것을 그것 그대로 인지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라캉은 인간 정신이 자기 외부의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못하고 어긋난다고 말합니다.
이는 인간이 언어 담론 체계 내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데에 기인합니다. 라캉의 ‘상징계’ 개념에 따르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상징을 익히고 자신만의 해석 스펙트럼을 통해 외부 대상을 파악합니다. 우리가 오감을 통해 외부 객체를 날것 그대로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눈앞의 가장 가까운 존재마저도 인식과 인지의 전제에 의해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외부의 어떤 것과도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인간은 상징의 한계에 필연적으로 구속되는 존재일 뿐입니다.
또한 인간은 욕망과 권태를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정신 작용의 필연적인 한계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설명에 따르면 유아기의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어머니와의 동일시를 갈구합니다. 하지만 이내 외부 세계를 상징하는 아버지로부터 거세 위협을 느끼고 어머니와의 상상적 동일시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경험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욕망의 완전한 충족’을 위해 어떠한 현실적 경험을 통해서도 이를 수 없는 이상적 자아를 상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끊임없이 유아기의 본원적인 갈구를 회고하며 이상적 자아에 이르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들을 전개하지만 결코 성취하지 못하는 이상적 자아의 굴레에 갇히게 됩니다. 요컨대 상상 속의 객체를 좇아 하는 헛발질과 끊임없는 욕망과 권태의 반복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갖는 것처럼 당연하고 필연적으로 주어지며 모든 인간은 그 안에서 고통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오카스테의 대사 중 “많은 사람들이 꿈속에서도 어머니 곁에 누워있으니까요“라는 부분은 정신적 의미에서의 필연성을 잘 드러내는 대목입니다.
자유
앞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가질 수 없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자유의 영역에서 필연적으로 명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완전한 수동성과 완전한 부자유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비약이다. 인간은 희곡 안의 주인공처럼 필연의 굴레에서만 머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구체적인 논증의 과정이 없어도 인간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결정을 내리며 나아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개인의 자유 의지 외에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필연과 인과의 법칙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방점을 찍을 따름이다.
실제로 필연과 결정론을 역설하는 스피노자 또한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만 실존하고, 자기 자신에 의해서만 행위 하도록 규정된 실재는 자유롭다고 불린다.” 요컨대 자신이 필연성 속에 머문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속에서 자유롭게 앎을 추구하는 실재가 바로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라는 말이다.
인간은 필연 속에서 자유를 영위할 능력을 가진다. 그리고 세계는 필연성과 우연의 종합이며, 인간의 복잡한 인지과정과 사고과정을 고려할 때 이는 곧 필연과 자유 의지의 종합으로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필연성과 자유 의지는 서로 다른 층위를 갖는다. 예컨대 자유 의지가 행사되고 관철되는 환경은 모두 필연성의 원칙에 의해 지배되고 운영되는 세계로서 필연의 법칙을 우선적으로 따르게 된다. 그러나 실제 세계에서 필연의 법칙은 개인의 자유 의지에 의한 작용에 비해 그 작용이 복잡하고 필연 법칙 간의 관계 또한 다면적이다. 따라서 실제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한 구동축인 필연의 법칙은 그 자체로서 세계를 구성하는 본원적인 추동력을 지니는 동시에 자유 의지가 행사될 수 있는 환경적 배경으로서도 기능하게 된다.
『오이디푸스 왕』 해석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는 자유 의지를 압도하는 운명적인 힘이 신탁과 예언의 형태로 드러나 있습니다. “만물을 보는 시간이 당신의 의지를 거슬러 찾아냈다네.”<1213>라는 부분은 ‘만물을 보는 시간’이 ‘인간의 의지’에 앞서 전제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그 작용은 테이레시아스의 대사에서 확인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413-415>. 테이레시아스는 인간이 자신에게 정해진 운명을 자각하지 못한 채 운명의 굴레에 갇혀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무지하고 수동적인 존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어떠한 행동을 해도 정해진 운명으로 귀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은 ‘우리가 자초한 불행<1231>이라는 말에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또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이원적인 ‘행복’ 개념을 통해서도 운명론적인 사고를 수용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중에서 사용된 ‘행복’의 의미는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용되는 행복의 의미와는 사뭇 다릅니다. 일반적 상황에서의 행복은 만족감과 기쁨과 같은 정서적인 반응을 전제하거나 또는 수반하지만 작중의 행복 개념은 정서보다는 전제된 자유 의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이디푸스의 일대기에서 오이디푸스가 이루어낸 업적들이 행복의 차원이 아니라 단순한 행운으로 치부되는 것은<1525-1526> 일견 자유 의지의 발로인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행위들이 결국 운명의 굴레로 귀결되기 때문이며 ‘누구나 행복을 느끼다가도 몰락하게 될 수밖에 없고 인간에게 속한 어느 것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1190-1197>것은 행복이 필연적으로 시간적 한계성을 전제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나아가 작품의 서사 전체가 운명론적 사고에 의해 추동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운명론적 내러티브가 지배하는 작중의 인물에게 자유 의지가 전제된 행복이란 환상에 불과하거나 지극히 일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르지 말아야하오.
그가 고통을 겪지 않고 삶의 경계를 지나갈 때까지는<1528-1530>
주인공인 오이디푸스의 자유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있지만 이는 모두 필연적인 운명적 비극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를 죽인 자에게 저주를 내린 것<224-254>, 스스로 눈을 찌르며 “두 눈아, 너희는 내 끔찍한 고통도, 내 끔찍한 행동도 보아서는 아니 되느니라”라는 발언<454>에서 오이디푸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으며 오이디푸스가 신이 점지하는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부분에서도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오이디푸스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에게 예견된 운명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운명적 진실을 적극적으로 규명하기 위한 오이디푸스의 시도에서도 오이디푸스의 진취적인 자유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친모이자 부인인 이오카스테도 “우연한 사건들이 지배하고 어느 일에도 분명한 예지가 없으니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사는 게 최선이지요<979-983>”라는 대사를 통해 운명론적 사고에 대한 반의(反意)를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텍스트 내에서 등장인물의 자유 의지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희곡의 말미에서 이러한 자유 의지의 표명도 결국 비극적인 운명의 한 부분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외재적인 관점에서 당시 글이 쓰여진 사회에서 신탁이 갖는 의의를 통해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아폴론 신탁은 그리스인들의 정신세계를 독점할 정도로 그들의 삶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인들은 국가 및 사회, 개인적으로 현실에 처한 운명과 싸우면서 미래를 알고 싶어 했고, 신탁의뢰를 통한 아폴론신 과의 영적교류를 통해 자기 가치에 대한 확신을 얻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요컨대 그리스 인들은 신의 재가가 없는 어떠한 일도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특히 예언능력이 출중한 아폴론 신의 재가를 승인 받기를 희망하였습니다. 그리스 인들이 델포이 신탁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헤로도토스 『역사』 1권 167
아길라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여 델포이로 사절을 보냈다. 피티아는 그들에게 어떤 관행을 도입하도록 지시했는데, 그것은 죽은 포카이아인들을 위해 제사를 후히 지내주고 육상경기와 전차 경주를 개최하라는 것이었다. 아길라인들은 지금도 그것을 지키고 있다.
헤로도토스 『역사』 6권 139
기근이 들고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자 궁지에 몰린 펠라스고이족은 델포이로 사절을 보내 지금의 재난에서 벗어날 방도를 물었다. 피티아가 대답하기를, 아테네인들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만큼 보상을 하라고 했다. 펠라스고이족은 아테네로 가서 자신들의 모든 범행에 대해 보상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처럼 작품의 배경이 된 고대 그리스에서 신탁이 갖는 의미는 절대적이었고 신탁으로 점지된 운명에 대한 수용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는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작품 안에서 자유 의지의 발현으로 해석될 수 있는 사례들이 결국에는 신탁이나 운명이라는 큰 기계장치 속의 톱니바퀴로서 기능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신 중심의 운명론적 사고를 문학적으로 과장하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문학과 신화의 장르적 특성 상 충분히 용인될 수 있는 수준으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델포이 신탁이 정치 상황에 대한 혜안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미루어보아 그리스의 극작가이자 정치인이었던 소포클레스의 개인적인 의사결정 방식과 경험이 작품에 반영되었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론
오이디푸스는 예견된 비극에 맞서 제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신탁이 지배적이고 운명론적 사고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오이디푸스와 같이 제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인간 군상은 보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일견 자유의 화신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품에서 궁극적으로 그리고자 하는 것은 자유 의지 그 자체의 발현이 아니라 자유 의지를 초월하여 운명을 관장하는 전제적인 힘이며 이러한 역학관계 속에서 바라본 자유 의지는 상대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합니다. 예컨대, 미래를 예견하고 실재를 구성하는 전제적인 힘 앞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운명조차 통제당할 수밖에 없는 투명한 유리 상자에 갇힌 동물의 처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오이디푸스가 하는 모든 선택은 운명적 비극으로 귀결될 뿐이며 어떠한 자유 의지도 의미를 갖지 못하고 미래의 주도적인 변화를 추동하지도 못합니다. 요컨대, 오이디푸스는 예견된 비극적인 운명의 희생양에 불과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