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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

통참 2021. 6. 2. 09:19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

 

 한국에 ‘천재’ 이어령이 있다면 일본에는 ‘대지성’ 다치바나 다카시가 있습니다. 그는 청년 시절 도쿄대학에서 불문과 철학, 두 번의 학사 과정을 거치며 스포츠 기자와 평론가로서 활약했고 지금은 논픽션 작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특이한 이력을 가진 노학자입니다. 여느 백과전서류 학자들과 다름없이, 그는 문과와 이과의 인위적인 구분을 무색하게 할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종횡무진하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그의 전공과는 다소 거리가 먼 우주와 뇌 과학 관련 논픽션 저서를 집필했습니다. 그의 저서는 최근작 ‘스무 살, 젊은이에게 고함’을 통해 처음으로 접했는데, 저서에서 오롯이 드러나는 그의 깊이 있는 통찰에서 과연 그가 ‘대지성’이라 일컬어지는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자의 책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에서 주장하는 저자의 대학교육론을 약술하자면 직업교육의 장이 되어버린 대학의 정체성을 바로잡고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3학4과를 위시한 ‘자유학예liberal arts’로서의 교양을 대학교육의 핵심 기치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학4과란 문법학, 수사학, 논리학과 산술, 기하, 천문, 음악을 일컫습니다. 지금처럼 대학이 자유학예를 경시하거나 심지어는 괄시하며 직업교육의 장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지식의 상아탑을 표방하고 마땅히 고등교육을 실시할 책임이 있는 대학교육의 컨텐츠가 법률가나 정부 관료, 또는 은행원이나 회계사, 더 나아가 회사원을 육성하기 위한 직업교육에 치우쳐있다는 사실은 저자가 문제 삼은 사회현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대 사회에서 적자(適者)가 되어 생존하기 위해서는 직업 교육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유학예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전문 분야가 너무나 많거니와 현대 사회에서의 대학의 변화된 위상을 고려할 때 직업 교육을 실시하지 않고 자유학예만을 부르짖는 것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인식적 사치일 수 있습니다. 사회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대학 교육이 원점으로 회귀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생존의 문제를 눈앞에 두고 있는 대학생들에게는 알맹이가 없는 이상주의에 불과합니다. 저는 한국의 독자로서 저자가 우려한 일본 고등교육과 교양수준의 문제점이 비단 일본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했는데, 책을 읽는 내내 일본 교육의 문제점을 우리가 십수년이 흐른 지금 그대로 답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Seven Liberal Arts


 그렇다면 이와 같은 문제의 원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대한민국 대학교육의 이정표이자 시금석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학교의 전신이 경성제국대학이었던 과거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국대학이라는 이름이 증명하듯, 최초이자 최대의 제국대학이었던 도쿄대학의 설립 목적이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행정관료를 육성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생각한다면 법학이나 상학과 같이 실학 중심으로 치우친 대학 교육제도는 순수 학문인 이학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문부성이 국가 관료를 육성하기 위해 대학교육에 깊게 개입한 이상 문부성의 입장에서 당장 ‘쓸 데가 없고 현학적인’ 이학은 실학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이와 같은 도쿄대학의 DNA를 복제하여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이 자유학예의 장으로 기능할 리는 구조적으로도 만무한 문제이며, 도쿄대학이 걸었던 길을 답습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것입니다. 물론 유능한 행정 관료와 우수한 연구 인력을 대거 육성하여 대한민국을 발전과 성장의 궤도에 빠르게 안착시킴으로써 경제 발전을 견인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공로는 결코 부정할 수 없습니다.

 
 또한, 대학이 관계와 깊게 결탁이 되어있는 구조적인 병폐와 더불어 이른바 ‘유능하다고 일컬어지는' 교수진 또한 교양부족과 지적망국을 초래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일례로, 작가에 따르면 도쿄대학의 교수진은 소수의 해외파 교수를 제외한다면 대다수가 자교의 졸업생으로 충당되었는데, 이렇듯 새로운 교육의 DNA가 유입되지 못한 채 경직된 교육과 구시대적 사고의 썩은 피가 대학 내부에서 순환하게 된다면 지적망국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현상은 한국도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야화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서울대학교에서 교편을 쥐고 있던 마르크스주의자 김수행 교수가 퇴임할 때 그의 후임자로서 장하준 교수가 공공연하게 거론되었지만 서울대 교수진들이 ‘자격미달’을 이유로 장하준 교수의 임용을 허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에 대해 이루어진 ‘수학을 사용하지 않는 경제학자’나 ‘경제학자라기 보다는 사회학자’, 또는 ‘비주류 경제학자’라는 비판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자격미달’의 문제를 내세운다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처럼 보입니다. 현재 장하준 교수는 능력을 인정받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종신교수직을 보장받아 재직 중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유전자’, ‘비주류’를 배척하는 한국 학계의 폐쇄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하준, 김수행 교수의 논리를 지지하기 때문에 예로 든 것은 아닙니다. 주류 경제학계에서도 위와 같은 폐쇄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사실 학계라는 곳이 이념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념이라는 것은 정반합(正反合)을 통해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다른 종(種)의 피가 섞이면 필연적으로 교수대에 올라 생사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특수성을 가진 학계에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현상입니다.

 

 

 마지막으로 광복 후 40년 동안 이어져 온 실용주의 노선은 필연적으로 자유학예의 흥망과 그 궤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입니다. 실용주의 노선의 학문적인 기치는 실학의 육성입니다. 당장 끼니를 걱정하고 배를 곯아야 하는 시기에 이학을 육성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정부가 이학보다 실학을 집중적으로 육성함으로써 국가의 유례없는 성장을 이끌어낸 것과, 단기간에 체제를 정비하고 문화 수준을 괄목할만한 수준으로 제고한 것은 소급하여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병폐들을 차치하고서라도 훌륭한 전략이었고 충분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배제되었던 이학의 육성이 반드시 후행됨으로써 실학과 이학의 공존을 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희망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현행 고등교육, 구체적으로 대학 교육이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지성인은 비단 저자뿐만이 아니며 그 수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화여대 에코과학부의 석좌교수인 ‘통섭학자’ 최재천교수는 학제간 융합을 역설했고, 앞서 언급한 장하준 교수는 권위에 대한 의심을 강조함으로써 대중들의 지적 능력을 고취하는데 이바지했습니다. 인문학을 필두로 한 교양 열풍도 주목할 만합니다. 바다 건너에서 던진 정의에 대한 물음이 한국 사회를 휩쓸기도 했고 노학자 죽음에 대한 고찰이 서점가의 매대를 장악한 것 또한 특기할만한 현상입니다. 그리고 장르를 불문하고 멋진 지적 활약을 보여주는 노학자 ‘천재’ 이어령과 같은 인물이 한국에도 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위와 같은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교양 열풍은 실체가 없는 허구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철저하게 합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 그리고 실증적인 사고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통섭의 결과로 도출되는 것은 창의성의 산물이 아니라 한낱 공상과 몽상에 불과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 글을 쓴 시점으로부터 2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위에 나열한 위인(?)들은 제 예상과는 달리 사회를 바꿀만한 힘을 전혀 보여주지 못 했고 사회 전반에는 미신과 허상을 좇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교양을 외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우리나라의 국민들이 진정한 교양인으로 거듭날 날은 아직도 요원해 보입니다.
 


 교양과 대학교육의 문제점으로 운을 뗐지만 아쉽게도 저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단지 대학 교육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던질 수 있을 뿐입니다. 다만 일본에 있는 국제교양대학의 화려한 행보에서 자유학예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