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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참노트/인문·철학

『우연과 필연 』 - 자크 모노(Jacques Monod)

by 통참 2021. 6. 7.

자크 모노(Jacques Monod), 1910-1976

 

우연은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난 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필연은 사물의 관련이나 일의 결과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의미상 우연은 필연의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우연만으로 지배되는 세계에 필연은 개입할 여지가 없으며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우연, 또는 완전한 필연으로 지배되는 세상은 사고실험이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연과 필연에 대한 의미 있는 논의를 전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현실 세계에서의 우연과 필연의 작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The concept of randomness and coincidence will be obsolete when people can finally define a formulation of patterned interaction between all things within the universe.” - Toba Beta

 

 

Toba Beta는 우주의 모든 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보편 법칙을 찾기 위한 인류의 과학적 탐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오랜 시간 동안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 간의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공식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특히 뉴턴에 의해 근대과학이 성립한 이래로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연과 불확정성을 제거하고 우주의 작동 원리를 설명할 수 있는 보편과 필연의 법칙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단 하나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가정에 근거했으며, 그 기저에는 신이 존재했습니다. 다시 말해, 근대의 과학은 자연현상을 탐구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신이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를 깨닫는 과정이라고 가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과 같은 복잡계 세계에서 우연의 발생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명백해졌습니다. 다시 말해, 오랜 시간 동안 신의 권위를 등에 업고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한 보편 법칙의 존재는 우연과 확률로 지배되는 계의 발견으로 그 권위를 의심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원자적 차원의 미세한 스케일의 계의 경우 우연의 작용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예컨대, 양자역학 이론에 따르면 전자와 같은 미시세계의 물체들은 그 작동 원리와 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거나 예견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인 나비효과또한 초기 조건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카오스 물리계의 비선형적 특성을 잘 나타냅니다.

 

이와 같은 발견은 비단 생기론적, 물활론적 사고와 같은 형이상학적 생명론의 권위에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닙니다. 현실 세계에서 우연의 발생을 전제하는 것은 일견 객관성의 가정에 올라선 과학의 공리와도 배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연의 발생을 인정하는 일과 필연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일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과학적 객관성의 개념은 일반적인 객관성의 개념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예컨대, 토머스 쿤은 과학적 객관성이 과학자들이 의견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가운데 확보되는 표준적인 설명의 반복, 다시 말해 과학자 집단의 패러다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시각을 배제하고 객관성의 개념을 결정론으로 귀결되는 수학적 구조로 정의한다면 우연의 발생과 과학의 공리가 배치될 수 있다는 상기한 우려를 완전하게 불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연의 발생이라는 불확정성을 결정론을 함축한 수학적 구조로 포괄하거나 치환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에도 불구하도 계의 구분과 확률론적 결정론을 통해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우려를 해소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고전역학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다루는 계를 아우르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수학적 구조를 통해 일상적이고 거시적인, 혹은 분자 수준의 극미한 물체의 운동을 잘 설명할 수 있습니다. , 고전 역학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우연의 발생은 필연적이라는 사실은 비교적 명확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연과 필연의 작용은 명확하게 구분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우연의 발생을 전제하더라도 확률론적 결정론이나 결정론으로 귀결되는 뉴턴역학의 효용성이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성의 가정을 바탕으로 한 과학의 세계는 이처럼 우연의 발생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 한 단계 더 진보했습니다. 우연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 전통적인 과학혁명의 개념처럼 기존의 패러다임을 붕괴시키고 그 자리를 완전히 대체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흔히 신으로 묘사되었던 보편 법칙의 존재 가능성에 경종을 울리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또한 인간의 존재를 둘러싼 필연성과 불가피성, 그리고 합목적성의 근거 없음을 밝혀냈고, 진화의 동력에는 목적이 있다고 바라보는 물활론적 사고는 본질적으로 인간 중심적인 환상에서 기인한 것임을 지적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물활론적 사고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 전제의 오류로부터 탈피한 새로운 과학 시대로의 진입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논의에 미루어 볼 때 책에서의 우연필연은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크 모노가 우연과 필연에서 말하는 우연필연은 무엇일까요. ‘우연은 새로운 과학적 사조의 등장과 이로 인한 물활론적 전통으로부터의 단절, 그리고 객관적 지식의 원천을 상징합니다. 이에 반해 필연은 물활론적 전통과 인간 중심적인 환상, 그리고 과학에서의 윤리적 전제와 낡은 사고의 틀을 상징합니다. 우연과 필연은 필연으로 대표되는 낡은 사고의 틀로부터의 탈피와 우연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과학 사조로의 이행 과정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과 그 타당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연과 필연의 개념을 새로운 과학 패러다임의 등장과 그로 인한 기존 패러다임의 붕괴로 파악하는 것은 토머스 쿤의 논의와 닮아 있습니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 또는 새로운 사조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사조가 권위를 의심받거나 나아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으로 인하여 기존의 패러다임이 그 타당성을 잃고 붕괴하는 것은 비단 자크 모노가 다루고 있는 영역에 국한된 것만은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은 가깝게는 현대 과학의 대명사가 되는 양자 혁명과 상대성이론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경영학에서는 패러다임 개념을 응용하여 기존의 기술 체계인 지속성 기술개념과 기존의 기술 체계를 대체하는 기술인 와해성 기술이라는 개념을 통해 기술 혁신과 경영 전략을 다루기도 합니다.

 

물론 자크 모노의 논의는 단순히 패러다임의 전환만을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생기론이나 물활론과 같은 형이상학적 생명론을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과학의 탈을 쓴 형이상학적 생명론은 비단 과학적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하게 할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객관적 지식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거나 과학과 적대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물활론은 진화의 과정에 목적을 향한 동력이 작용한다고 보지만 실제로 진화의 과정은 분자적 차원의 미시세계에서 발생한 우연의 결과일 뿐이며, 이러한 우연의 발생은 어떠한 법칙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예측 가능한 방향성을 지니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화의 과정에서 목적을 설정하기 위한 물활론의 시도는 진화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우연성의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비과학의 견강부회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 과학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생명론은 여전히 잔존하며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생명론은 단순히 새로운 과학적 사조에 대한 반동과 저항이 아닙니다.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르는 일반적인 반동과 저항은 오히려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것입니다. 과학계의 패러다임 전환은 사람들의 계몽을 유도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새로운 것을 경계하는 사람들의 저항에 직면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천동설의 패러다임에 맞서 지동설을 제창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소에 회부되었고 환경과 양육 일변도의 학계에서 본성과 유전의 중요성을 역설한 많은 진화심리학자들이 인간의 선발육종을 찬성하는 우생학자, 또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오명을 쓰기도 했습니다. 물론 과학 패러다임 자체는 아무런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저항은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혁신적이고 급진적일수록 강해집니다. 따라서, 우주의 작동 원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혁신적인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사람들의 저항 또한 더욱 거세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반동과 저항이 과학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과학의 탈을 쓴 사이비 과학이 득세하게 된다면 이는 비과학을 넘어 과학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반과학이 될 수 있습니다.

 

 

C.P. Scott, 1846-1932

 

Comments are free but facts are sacred.” - C.P. Scott

 

 

‘논평은 자유지만 사실은 신성하다.’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인 C.P. Scott은 언론이 가야할 길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가치와 사실을 구분하자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견지해야 할 태도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인위적인 가치판단이나 주관적 해석에 앞서 가치에 무지한 지식을 신성시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물론 어떠한 과학적 사실이라도 가치 판단과 무연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지식과 가치를 구분해야 한다는 지침 또한 윤리적인 가치 판단을 내재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사실과 가치, 그리고 지식과 가치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러한 의무는 가치 판단과 과학의 방향성을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하는 형이상학적 생명론이라는 비과학의 위협으로부터 과학을 지키기 위한 과학자들의 사명임에 다름아닙니다.

 

객관성의 가정으로 무장한 과학은 지난 3세기 이상 인간의 사고에 점진적으로, 그러나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과학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 많은 사람들은 존재의 기저에 필연성과 합목적성을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생기론의 인위적 구분과 물활론의 보편적 목적 원리는 관찰과 증명이 아닌 주관적 가정의 토대 위에 세워졌고, 이러한 형이상학적 생명론은 오랜 세월동안 종교와 철학, 심지어 일부는 과학의 감투를 쓰고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사고의 본격적인 태동으로 인해 태생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한 한계를 지닌 생기론과 물활론, 그리고 그 잔재로 구성된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은 파생적 이론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중심적 환상의 발현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되었고, 과학이 득세할수록 점점 더 권위를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비과학과 반과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횡행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문명화된 인간 사회에 성공적으로 안착했지만 인간의 마음과 정신까지 완전히 얻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과학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과학을 다루는 사람들의 문제에 기인한 경우가 많습니다. 특정한 목적의식과 방향성을 가지고 과학을 의도적으로 오용하거나 과학적 결과를 곡해하는 경우 때문입니다. 원전의 안전성과 안정성, 그리고 경제성을 아무리 역설해도 이를 정치적 이익을 위해 오용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전형적인 반과학의 횡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반과학이 과학의 아성을 위협하는 것은 분명 이성과 합리의 상아탑을 쌓아 온 문명의 발전사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비과학과 반과학이 다시금 횡행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우연의 길일지 아니면 필연의 길일지, 자크 모노의 논의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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